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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점점 더 무뎌지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연인 간의 사랑으로 뜨겁고, 달콤하고, 설레고, 두근거리고, 애틋하고, 이별 후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그리운... 사랑이, 그런 사랑에만 머문다면 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우연히 스친 한 여자를 잊지 못해 밤새 그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누가 머라 하건 사랑은 그냥 사랑인 것 같다. 미지근한 것도 사랑이고, 차가운 것도 사랑이다.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건 아니다. 우리 몸을 지나갈 것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다. 원하던 것을 가졌고, 가지지 못한 것들은 포기했다. 그리고 남은 것이, 희미한 재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56page>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릴 일도, 볼 빨개질 일도 없는 불혹의 시간을 기다리는 나이기에, 사랑은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처럼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미지근한 것도 차가운 것도 사랑이라니. 나 아직 사랑을 하고 있는 거구나. 사랑의 온도만 조금 변했을 뿐, 사랑은 그냥 사랑으로 내 가슴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구나.
오래전 나는 오로지 한 사람, 하나의 사랑에만 함몰되어 있었다. 세상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갔었고, 우리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멈춰 있었다. 모든 노래의 가사는 내 얘기였고, 구슬픈 멜로디는 귓속에 스며들어 마음을 적시곤 했다. 눈물은 詩가 되고 손끝에서 피어난 문장들은 오롯이 그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에 숱한 밤을 잠 못 이루며 뒤척였고, 후에 찾아온 이별엔 몇 개의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곤 했던, 오래전 나의 뜨거웠던 사랑. 그때의 나는 뜨거웠지만, 하나의 사랑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랑은 보질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다. 아니, 그랬다. 사랑을 잃은 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엄마와 할머니. 나의 세계에 함몰되어 있던 나는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고, 그저 나의 세계 속에서 웅크린 채 하염없이 슬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다' 생각되면서도 그 시절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무모했기에, 어쩌면 순수했기에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믿고, 내 모든 것을 던졌던 사랑. 비록 상처로 끝나긴 했지만, 이 또한 사랑이었음을...
<헤어져야 할 때 헤어져야 하는 사랑. 헤어져야 할 때 헤어질 수 있는 사랑. 그것도 사랑. 그래야 사랑. 바다 앞 어느 여관 낡은 방에 쓸쓸히 누워 헤어짐을 결심하기 좋은 장소는 바다만 한 곳이 없지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스무 살 시절이 있었다. 192page>
+ 많은 것들이 나를 떠나갔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나를 떠나갔는지. 떠나갈 거면서 왜 왔는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데... 내게 웃었던 그것들이여. 팔짱을 끼었던 그것들이여. 나를 망쳐버린 그것들이여. 잘 지내시는지.
+ 가끔은, 그렇게 하나의 사랑에 함몰되었던 그 시절의 뜨거웠던 사랑이 그립기도 하다. 새까맣게 가슴이 타버려 재만 남았던 시절의 사랑. (아마 두 번 다시 이런 사랑을 할 순 없겠지만) 잊고 있었는데, 최갑수 작가님의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을 읽으면서 풋풋했던, 그리고 무모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비록 상처로 남고, 상처로만 기억된 사랑이었지만. 아, 나에게도 그렇게 뜨거웠던 계절이 있었지 하며. 지금은 어쩐지 낯간지러운 '사랑'이라는 단어가 참 어색하기도 한데, 오랜만에 소녀감성에 젖어들 수 있어 좋았다.
+ 행복이라는 건 말이야,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거야. 네가 엿본 건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 너에게는 네게 꼭 맞는 행복이 분명히 있어
+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내 사랑이 좋다. 비록 사랑의 온도는 미지근할지 몰라도, 하나의 사랑에만 함몰되지 않고 많은 것들을 보고,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길섶에 핀 노란 민들레의 얼굴이 사랑스럽고, 솔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사랑스럽고, 봄이 오는 소리에 맞춰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나무들의 열정이 사랑스럽다. 매일 아웅다웅 다투는 남편이지만, 함께 있음에 행복하고 사랑한다. 비록 늦어버리긴 했지만 얼마나 딸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딸을 걱정했는지, 당신의 아픔과 고민은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도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세월과 함께 주름살 하나 더 늘어가겠지만, 보다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나는 좋다. 한차례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격정적이고, 뜨거웠던 그 계절을 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그 계절을 거쳐왔으니 아쉬움은 없다. 단지 가끔, 아주 가끔 꺼내보는 추억의 사진첩처럼 그리울 뿐. 또 가끔 또 그렇게 그리워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사랑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언젠가 또 지금의 나를 그리워할 나를 위해. <인생이란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짧으니까, 그래서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기엔, 한 곳에 머물러 살기엔, 아까운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사실은 밥 먹고 설거지하고 영화 보고 친구들과 수다 떨며 살아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게 대부분이다. 팔 할은 이런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삶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도록 하자. 열심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여행을 떠나자. 혁명은 멀고 사랑은 간절하니까. 2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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